웨인 티보 국내 첫 회고전…회화·드로잉 대표작 105점 한자리에
대표작 105점 통해 ‘질서·대칭·균열’로 75년 그림 역사 재조명
두껍게 쌓아 올린 물감부터 강렬한 색채까지…티보의 세계 엿보기
현대카드가 31번째 컬처프로젝트 ‘웨인 티보 전’을 개최한다. <사진=이지원 기자>
“나는 그저 아름다운 장소를 보고 그것을 그리는, 풍경의 회화적 측면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풍경을 다루고 변형하면서 그것을 무엇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고 싶다”
‘케이크와 파이, 아이스크림을 그린 팝아트 거장’은 웨인 티보(Wayne Thiebaud)를 설명하는 익숙한 수식어다. 하지만 웨인 티보의 작품 속 디저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다른 기하학적 규칙이 모습을 드러낸다. 케이크는 원기둥이 되고, 잘려나간 파이는 삼각형으로 환원된다. 일상의 사물을 그렸지만 그 아래에는 선과 면, 색채로 만들어진 질서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카드가 현대 사회의 소비문화를 표현하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는 웨인 티보의 작품 세계를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인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저서 ‘말과 사물(The Order of Things)’에서 차용했다. 푸코의 말과 사물이 우리가 세계를 보고 인식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를 탐구했다면, 이번 전시는 ‘질서와 교란’을 키워드로 티보의 75년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다.
18일 현대카드는 서울 중구에 위치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31 웨인 티보 전’ 기자 간담회를 진행했다. 웨인 티보는 케이크와 사탕 진열대, 캘리포니아 도시 풍경 등 일상적인 소재를 자신만의 색채와 시선으로 표현한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다.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열리는 티보의 첫 회고전으로, 회화와 드로잉 등 대표작 105점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모더니즘과 팝아트 분야 전문가인 디터 부흐하르트(Dieter Buchhart)와 안나 카리나 호프바우어(Anna Karina Hofbauer)가 공동 기획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티보가 약 75년에 걸쳐 구축한 작품 세계를 단순히 ‘팝아트’라는 틀로 바라보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웨인 티보의 작품 ‘샐러드, 샌드위치와 디저트’. <사진=이지원 기자>
티보가 처음부터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전통적인 방식의 자화상을 제작했고,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을 비롯한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으며 자신만의 색채를 찾아갔다.
그 과정에서 그의 시선은 자신이 잘 알고 사랑하는 일상으로 향했다. 식료품점 진열대와 케이크, 파이, 사탕, 아이스크림, 구두 등 누구에게나 익숙한 사물들이 캔버스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티보는 눈앞에 있는 사물을 그대로 따라 그리지 않았다. 실제 사물을 앞에 놓기보다 기억 속에 남은 이미지를 다시 재구성했다. 현실의 사물이 그의 기억을 거치면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티보는 줄지어 놓인 케이크를 원기둥으로, 잘린 파이는 원의 일부이자 삼각형으로 환원해 바라봤다. 그가 단순히 소비사회의 사물을 그린 팝아트 작가가 아닌,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든 작가로 기억되고 있는 이유다.
1960년대 팝아트가 전후 소비사회의 광고와 브랜드, 상품 패키지 등 상업적 이미지를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면 티보는 같은 시대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팝아트의 흐름에 함께 놓이면서도 소비사회의 기호 자체보다 그 안에 숨어 있는 형태와 색채, 질서에 시선을 둔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당시 팝아트의 유행 속에서도 티보만의 독자적 위치를 만드는 장치가 됐다. 디터 부흐하르트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전의 어떤 작가와도 다른 방식으로 추상성과 완전한 구상성을 결합했다는 점”이라면서 “티보가 그리는 모든 것은 기하학적 형태, 즉 추상적인 형태에서 다시 구성되며 우리가 눈앞에서 보는 대상을 해체하고 다시 구성해 보여 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의 인물들은 광고적인 배경도 없고, 역사적인 맥락을 암시하는 배경도 제거돼 있다. 오직 인간 그 자체만을 보여 준다는 것”이라며 “이것이 티보가 이룬 중요한 성취 가운데 하나”라고 강조했다.

웨인 티보의 작품 ‘두 개의 웨딩 케이크’. <사진=이지원 기자>
티보는 정교한 질서를 구축한 뒤 그 안에 작은 균열을 집어넣는 방식을 사용한다. 티보의 작품인 ‘두 개의 웨딩 케이크’ 속에서 케이크들은 언뜻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묘한 차이가 숨어 있다. 정적인 공간 속 흐트러진 신발 한 짝이나 뒤집힌 아이스크림 역시 화면의 규칙을 깨뜨린다.
색채 역시 질서를 교란하는 장치가 된다. 티보의 아내이자 뮤즈인 베티 진을 그린 ‘베티 진 티보와 책’에서는 가슴 아래를 가로지르는 강렬한 오렌지색 선이 코끝과 눈가에서도 반복된다. 평범해 보이는 인물화 속에서 색채라는 장치를 넣어 ‘당신이 생각하는 모습 그대로일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내용을 숨겨 둔 것이다.
그림자를 표현하는 방식에도 주목할 만하다. 티보의 그림 속 그림자에는 라벤더와 오렌지, 파랑과 노랑 등이 스며들어 스펙트럼과 같은 색채를 자아낸다. 현실에서 사물에 종속되는 그림자가 티보의 그림에서는 본래의 대상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생명력을 얻게 된다.
안나 카리나 호프바우어는 “언뜻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 그대로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무언가 다르다”며 “이는 질서와 무질서, 그리고 교란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웨인 티보의 작품 ‘둥글게 놓인 디저트’ 속 그림자 표현. <사진=이지원 기자>
이번 회고전에서 또 하나 주목할 지점은 티보가 표현한 특유의 질감이다. 티보에게 물감은 사물을 묘사하기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물감을 화면 위에 두껍게 올리는 ‘임파스토(impasto)’ 기법을 활용해 사물 자체의 물성을 화면 위로 끌어냈다.
특히 케이크를 그릴 때는 물감을 실제 생크림처럼 두껍게 쌓았다. 일부 작품에서는 물감층 자체가 최대 8mm 두께까지 쌓이며 캔버스 위 프로스팅이 실제 케이크처럼 보이는 착시를 만들어낸다. 물감 자체가 케이크에 바른 크림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다.
‘길거리 음식’이나 ‘감자튀김’ 등 그의 초기 작품을 통해 티보는 소박하고 흔한 사물들을 하나씩 분리해 배치함으로써 물감 자체가 물질적인 존재감과 구조적인 무게감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은 기법과 질서는 티보의 75년여 그림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티보의 질감은 그의 작품 세계가 오랜 시간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변화해온 흔적이기도 하다. 초기에는 비교적 한 방향으로 물감을 쌓아올리는 방식이었다면, 1960년대 초부터는 보다 엄격하고 패턴화된 질감이 등장했다. 그 안에서도 불규칙한 붓질을 남겨 다시 완벽함에 균열을 냈다.
이것이 티보가 수십 년에 걸쳐 케이크와 아이스크림, 인물 등 비슷한 모티프를 거듭 그렸음에도 그의 작업을 단순한 ‘반복’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안나 카리나 호프바우어는 “그는 자신이 애정을 가진 여러 주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했으며, 이번 전시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서 “1960년대에 그렸던 주제를 훗날 다시 작업하기도 하고, 새로운 주제를 시작했다가 과거에 탐구했던 주제로 다시 돌아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티보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핵심은 ‘반복’보다는 ‘일관성’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는 그 일관성 안에서 계속해서 발전한다. 같은 주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면서도 그 안에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티보의 작품에서 계속 발견되는 특징”이라고 부연했다.
사물에서 시작한 티보의 질서는 인물화에 이르면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그가 그린 사람들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좀처럼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다. 다섯 명이 함께 있는 그림에서도 누구 하나 상대방을 바라보지 않는다. 나란히 앉아 음식을 먹는 인물들 역시 물리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각자의 세계에 머문다.
티보는 이러한 상태를 ‘외로운 함께 있음(lonely togetherness)’이라고 표현했다. 함께 존재하면서도 서로에게 완전히 닿을 수 없는 인간의 거리감이다. 하지만 티보의 고독은 절망과는 다르다. 그의 그림 속 사람과 사물은 다른 존재와 완전히 연결되지 않더라도 각자의 세계에서 온전하게 존재한다는 뜻을 담아낸다.
안나 카리나 호프바우어는 “티보의 그림은 절망을 그린 작품이 아니라 존재에 관한 그림”이라며 “사람과 사물은 다른 세계와 맞닿지 않더라도 자기만의 세계 안에서 완전하게 존재한다”고 말했다.
베티 진 티보와 책. <사진=이지원 기자>
그에게는 과거의 미술 역시 재구성의 대상이었다. 티보는 “예술은 예술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만큼 미술사를 중요하게 여겼다. 선대 작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실제 자신의 그림 속에 다른 미술작품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실제로 티보의 아내이자 뮤즈인 베티 진을 그린 작품에는 펼쳐진 미술 서적이 등장한다. 책 속에는 티보가 존경했던 에드가 드가의 작품이 담겨 있다. 미술의 역사와 개인의 기억, 일상의 사물이 그의 그림 속에서 새롭게 합쳐져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 있게 되는 것이다.
이번 전시가 서울에서 열리는 의미에도 주목할 만하다. 디터 부흐하르트는 “서울은 처음부터 이번 전시의 당연한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며 한국의 일상과 의례에도 티보가 작품에서 탐구했던 것과 같은 ‘질서’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긴장은 티보가 살았던 새크라멘토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서울에서도 여전히 생생하다”며 “캘리포니아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 오늘날 서울에서도 즉각적으로 와닿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웨인 티보의 작품 ‘백 살 광대’. <사진=이지원 기자>
전시의 마지막에서는 티보가 100살이 된 2020년에 완성한 자화상 ‘백 살 광대’를 만날 수 있다. 화면 속 노년의 티보는 마치 그림의 프레임을 넘어 밖으로 걸어 나오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는 이듬해인 2021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백 살 광대 속 티보는 흰색 화장과 의상을 한 나이 든 광대의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티보는 마지막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삶과 예술을 조용하고 깊이 있게 돌아봤다. 이를 통해 티보에게 그림이란 세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작업이 아닌, 세계를 이해하고 다시 조직하는 삶의 방식에 가까웠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75년간 이어온 작가의 작품 세계를 시각적 질서와 대칭, 그리고 균열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하는 세계 첫 전시”라며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웨인 티보 회고전을 통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대 사회 속 질서와 삶의 의미를 사유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31 웨인 티보 전은 오는 19일부터 내년 2월 21일까지 서울 DDP에서 열린다. 티켓은 현대카드 DIVE 앱과 NOL 티켓, 카카오톡 예약하기에서 구매할 수 있다.
한편 현대카드는 지난 2011년부터 음악과 연극, 미술, 무용, 건축, 영화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 아이콘을 국내에 소개하는 컬처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그동안 크라프트베르크의 공연을 비롯해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과 팀 버튼, 패션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 등의 전시를 선보였다.
[CEO스코어데일리 / 이지원 기자 / easy910@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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