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H-1B 비자 수수료 1000달러→10만달러로 100배 인상
‘수십~수백조원 투자’ 삼성·SK, 미 현지에 반도체공장 건설키로
비자 수수료 폭탄에 전문인력 수급 ‘비상’…“수천억 부담해야 할지도”
美서 ‘잭팟’ 터뜨린 K-반도체…첨단 칩 공장 구축, 갈수록 리스크 커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내 전문 직종에 취업할 수 있는 ‘H-1B’ 비자의 수수료를 기존의 100배인 10만달러(약 1억4000만원)로 인상키로 했다. 별안간 전해진 소식에 미 현지 공장을 짓고 있는 국내 기업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수십~수백조원을 투자해 미 반도체공장을 짓고 있거나 착공 예정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근심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첨단 칩 생산라인을 서둘러 구축해야 하는 삼성·SK로서는 국내 전문 인력을 미국으로 불러들이지 못할 수 있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다. 반도체 인재 수급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천문학적 규모의 대미 투자에도 K-반도체는 당장 비자 문제 해결이라는 숙제를 떠안게 됐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9일(현지시간) 미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H-1B 비자 수수료를 기존 1000달러(약 140만원)의 100배인 10만달러로 올리는 내용의 포고문에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경우에 따라 기업들은 H-1B 비자를 위해 많은 돈을 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H-1B 비자 수수료의 100배 인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주창해 온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와 크게 무관하지 않다.
H-1B 비자는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 전문 직종을 위한 비자로, 추첨을 통한 연간 발급 건수가 8만5000건으로 제한돼 있다. 기본 3년 체류가 허용되고, 추후 갱신을 통해 연장도 가능하다, 영주권도 신청할 수 있다.
다수의 미 현지 기업 들은 H-1B 비자를 통해 해외 전문 인력을 대거 확보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부분을 문제 삼았다. 그는 “미 기업들이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하기 위해 H-1B 비자를 악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포고문에 “(H-1B 비자는) 미국에 일시적으로 외국인 근로자를 데려와 숙련된 업무를 수행하라고 마련됐으나, 미국인 근로자를 보완하기보다 저임금·저숙련 노동력으로 대체하는 데 악용돼 왔다”며 “체계적 남용을 통해 미국인 근로자를 대규모로 대체하면서 경제 및 국가 안보를 훼손했다”고 명시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새 수수료 규정은 현지시간으로 21일 0시 1분을 기해 발효됐다. 이에 당장 해외에서 인재를 수급해 왔던 미 현지 기업들은 H-1B 비자 수수료 폭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문제는 이번 비자 문제가 비단 미국 기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 현지에서 사업을 추진 중인 국내 기업도 한국인 근로자를 미국에 불러들일 때 똑같이 100배 늘어난 H-1B 비자 수수료를 적용 받는다.
당장, 새 수수료 규정에 따라 미국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은 한국에 있는 양질의 인력을 미국으로 데려오기가 더 곤란해졌다. 비자 발급도 어렵지만, 앞으로는 거액의 비자 수수료까지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수십~수백조원을 쏟아 부어 미국 현지에 대규모 반도체공장을 건립 중이거나 지을 예정인 K-반도체는 전문 인력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현재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굴지의 반도체 업체들은 미국에 거액을 투자해 반도체 생산 설비를 구축 중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021년 미 텍사스주에 170억달러 규모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현재 건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해당 공장의 외관은 이미 대부분 완성됐고,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은 이에 맞춰 내부 설비 반입을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또한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370억달러를 투자해 미 텍사스주 테일러에 건설 중인 반도체 생산 공장에 추가로 신규 공장을 건설하고, 패키징 시설과 첨단 연구개발(R&D) 시설을 신축키로 했다.
SK하이닉스도 지난해 4월 미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38억7000만달러를 투자해 차세대 HBM 등 반도체 생산 시설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에 AI(인공지능) 반도체용 AVP(어드밴스드패키징) 생산 기지를 구축하는 것은 SK하이닉스가 최초다. SK는 인허가 등 공장 설립을 위한 사전 작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SK가 미국 반도체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미 정부가 H-1B 비자 수수료 인상을 통해 국내 우수 인재 수급에 제동을 걸면서 미국 사업에 차질을 빚을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물론 엄청남 비자 수수료를 피하기 위해 미국에서 필요한 근로자를 모두 충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K-반도체가 현지 공장을 원활히 가동하기 위해선 최소 20%의 숙련된 국내 인력이 요구된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까지 삼성전자의 미 텍사스주 테일러공장에서 발생한 직·간접 고용은 건설직을 제외하고도 3700여 명이나 됐다. 이를 토대로 단순 계산하면, 삼성 테일러공장 근로자 중 20%인 740여 명은 한국인 근로자인 셈이다.
만약 이들 근로자가 H-1B 비자가 아닌 다른 비자로 미국에 입국했다면 추후 해당 비자를 신규로 받아야 한다. 이 때 발생하는 비자 수수료는 무려 1036억원에 달한다. 이는 기업 입장에서 상당히 부담스러운 금액일 수밖에 없다.
당장, 미국 사업에 전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선 미 반도체공장 구축이 시급한데, 트럼프 행정부의 ‘비자 수수료 폭탄’으로 사업 추진 동력이 떨어질지 우려하고 있다.
현재 K-반도체는 미국에서 ‘잭팟’을 터뜨린 상태다. 먼저 지난 7월 말 삼성전자는 테슬라와 22조7648억원 규모의 파운드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머스크 CEO는 “삼성전자의 대규모 텍사스공장에서 테슬라의 차세대 AI6 칩이 양산될 것이다”며 “이는 과장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결정이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테슬라가 생산 효율성 극대화를 돕는 데 삼성도 동의했다”며 “진전 속도를 가속하기 위해 직접 삼성전자 생산라인을 둘러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머스크의 발언을 종합하면 삼성은 2033년 말까지 테슬라의 차세대 AI6 칩을 주력 양산할 예정이다. AI6는 테슬라가 자체 개발한 자율주행용 AI 반도체로, 완전 자율주행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필수 칩 중 가장 최첨단 제품이다. 해당 칩은 내년 가동 예정인 삼성전자 미 텍사스 테일러공장에서 생산된다.

이뿐만 아니다. 삼성전자는 애플의 차세대 칩도 미 텍사스주 오스틴공장에서 생산하기로 했다. 지난달 초 팀 쿡 애플 CEO(최고경영자)는 “우리는 향후 4년 간 미국 전역에 6000억달러를 투자하고, 새로운 미국 제조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돼 자랑스럽다”며 “이번 계획에는 미 전역의 10개 기업과의 신규 및 확대 협업이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쿡 CEO가 언급한 10개 기업 파트너사에는 삼성도 포함됐다.
애플은 “삼성의 미 텍사스주 오스틴공장에서 새로운 혁신 기술을 도입해 차세대 칩을 제조할 계획이다”며 “이는 아이폰을 비롯한 애플 제품의 전력 효율과 성능을 최적화하는 데 사용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애플과 해당 기술 개발 협력을 통해 첨단 이미지 센서를 양산한다는 구상이다. 통상 애플이 신제품 준비에 2~3년가량 시간을 들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삼성은 이르면 2027년 이후 아이폰에 이미지 센서를 공급할 것으로 관측된다.
SK하이닉스는 6세대 HBM인 HBM4를 중심으로 엔비디아, AMD 등 주요 AI 반도체 업체들을 공략할 채비를 마쳤다.
지난 12일 SK하이닉스는 초고성능 AI 메모리 HBM4 개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양산 체제를 세계 최초로 구축했다고 밝혔다. SK는 안정성을 검증 받은 자체 패키징 기술인 어드밴스드 MR-MUF(매스리플로우-몰디드언더필) 공정을 통해 HBM4를 효율적으로 고단 적층함과 동시에 방열 성능을 대폭 끌어올렸다.
이에 이전 세대인 ‘HBM3E’보다 대역폭이 2배로 확대됐고, 전력 효율은 40% 이상 개선됐다. SK가 세계 최고 수준의 데이터 처리 속도와 전력 효율을 실현한 것이다.
개발을 이끈 조주환 SK하이닉스 HBM개발담당 부사장은 “HBM4 개발 완료는 업계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며 “고객이 요구하는 성능, 에너지 효율, 신뢰성을 모두 충족하는 제품을 적시에 공급해 AI 메모리 시장에서의 경쟁 우위를 확보하고 신속한 시장 진입(Time to Market)을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 ‘HBM4’. <사진=SK하이닉스>
삼성과 SK 모두 미국에서 수익성을 제고할 수 있는 ‘대박’ 기회를 따내고, 현지 사업 추진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당장 비자 문제 등으로 미 현지 생산 설비 구축에 차질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러다간 삼성·SK가 테슬라, 애플, 엔비디아 등 미국 고객사를 모두 잃는 것 아니냐는 분석마저 제기된다.
다만, 일각에선 미국 법인을 둔 국내 기업의 경우, 미 현지에서 근무할 국내 인력에 대해 대부분 주재원 비자인 ‘L-1’ 비자를 발급받도록 하기 때문에 이번 조치로 인한 직접적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삼성·SK 모두 미 현지에 법인을 갖고 있는 만큼 L-1 비자를 받기가 수월할 수도 있다. 그러나 L-1 수수료도 만만치 않다는 단점이 있다. L-1 비자 수수료는 4500달러(약 630만원)다. 여기에 근로자 50명 이상 또는 전체 직원의 50% 이상이 L-1 비자를 소지하고 있는 업체의 경우 1인당 4000달러의 특별 수수료를 추가로 내야 한다. 결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국내 우수 인재 1인당 8500달러(약 1200만원)씩 부담해야 하는 셈이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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