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2심 재판 시작 후 처음 법정 출석
항소심 앞두고 국민연금 손배소 변수 생겨
행정법원은 ‘삼바 회계 처리 기준 위반’ 판결
‘뉴 삼성 비전 실현’ 이재용 경영 행보 비상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부당합병·회계부정’ 항소심 공판이 30일 시작됐다. 이 회장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가 재점화 하면서 반도체 패권 회복, 미래 먹거리 발굴 등 ‘뉴 삼성’ 재건이 시급한 이 회장의 경영 행보에 다시 적신호가 켜졌다.
서울고법 형사13부(백강진, 김선희, 이인수 부장판사)는 30일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 등에 대한 첫 공판을 열었다. 이날 공판에는 2심 재판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이 회장이 직접 출석해 눈길을 끌었다. 공판기일은 공판준비기일과 달리 피고인 출석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고법에 모습을 드러낸 이 회장은 취재진의 질문에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고 법정으로 향했다.
부당합병·회계부정 항소심의 주요 쟁점은 1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증거 자료에 대한 증거 능력 인정 여부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목적이 ‘경영권 승계’에 있는지 여부 등이다.
먼저, 검찰은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합병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 등에 대한 강제 수사를 통해 증거를 확보한 바 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혐의와 관련한 자료만 추려 압수하지 않고, 통째로 서버를 압수한 것은 절차상 위법하다는 삼성측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에 검찰은 항소심에서 2144개의 추가 증거를 제시하며 해당 자료의 증거 능력을 인정받으려 하고 있다. 삼성측은 상당수가 위법 수집 증거라는 입장을 재판부에 제출하며 검찰 주장에 맞섰다.
또한 양측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두고 치열한 공방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그간 검찰은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삼성 미래전략실(미전실)이 합병을 결정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이 회장의 승계나 지배력 강화가 유일한 목적이 아니기에 전체적으로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며 “이 회장과 미전실이 합병을 결정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검찰은 즉각 항소했다. 당시 검찰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의한 그룹 지배권 승계 목적과 경위, 회계부정과 부정 거래 행위에 대한 증거 판단, 사실 인정 및 법리 판단에 관해 1심 판결과 견해 차가 크다”며 “그룹 지배권 승계 작업을 인정한 법원 판결과도 배치되는 점이 다수 있다”고 지적했다.
항소심 공판이 본격 시작되면서 이 회장은 또다시 사법 리스크에 발목이 잡히게 됐다. 이는 이 회장의 경영행보에 적잖은 위기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이 회장은 4년째 이어지고 있는 법정 다툼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2020년 10월 부당합병·회계부정 재판이 처음 시작된 후부터 올해 2월 최종 선고까지 약 3년 5개월 동안 심리는 무려 107차례나 열렸다. 이 중 이 회장은 총 96차례 직접 출석했다.
이 기간 동안 이 회장은 그룹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사실상 모든 재판에 출석하는 바람에 반도체 경쟁력 제고,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한 지속 투자 등 굵직한 현안과 관련한 의사결정을 내리기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에 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재도약 시키겠다는 이 회장의 뉴 삼성 비전 실현도 상당 기간 동안 미뤄지고 말았다. 그 사이 ‘메모리 최강자’이던 삼성전자는 HBM(고대역폭메모리) 패권을 경쟁사에 내줬고, 스마트폰 등 일부 주력 사업도 중국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특히 과거 ‘M&A(인수합병)를 통한 신성장 동력 발굴’ 계획도 점차 잦아드는 추세다. 특히 지난 2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으며 사법 리스크를 털어내는 듯했던 이 회장은 검찰의 항소로 길고 길었던 법정 다툼을 다시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 회장이 1심과 같이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받을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안개속이다. 2심 공판이 열리기에 앞서 변수가 생겼기 때문이다.
최근 국민연금공단(국민연금)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으로 피해를 봤다며 이 회장 등을 상대로 5억원대의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손해 배상 청구 대상은 삼성물산 법인 외에 이 회장, 최지성 전 미전실 실장,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복지부) 장관,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등 총 8명이다.
손해 배상 청구액은 5억100만원이지만, 향후 소송 과정에서 전문가 감정 등을 통해 피해 금액을 구체적으로 산정함에 따라 청구 규모는 더 커질 수 있다.
눈여겨볼 점은 국민연금이 손해 배상 청구권의 소멸 시효(10년)가 불과 1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결정된 2015년 7월 주주 총회(주총)를 기준으로 소멸 시효는 내년 7월까지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한 2015년 9월 당시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지분 11.21%를 보유한 대주주였다. 양사는 2015년 5월 이사회를 거쳐 제일모직 주식 1주와 삼성물산 약 3주를 바꾸는 조건으로 합병을 결의했다. 이후 두달 뒤 열린 임시 주총에서 합병안이 가결됐고, 같은해 9월 1일 공식 합병했다.
이로써 제일모직 지분 23.2%를 보유했던 당시 이 부회장은 합병 이후 지주사 격인 삼성물산 지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면서 그룹 지배력을 강화했다.
또 지난달 14일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최수진 부장판사)는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가 증권선물위원회(증선위)를 상대로 낸 시정요구 등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하면서도, 삼바의 2015년 삼성바이오에피스(삼성에피스) 지배력 상실 처리와 관련해 ‘회계 처리 기준 위반’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으로 파악됐다.
재판부는 “삼바는 자본 잠식 등의 문제를 회피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별다른 합리적 이유가 없는 상태에서 ‘단독 지배에서 공동 지배로 변경됐다’고 주장했다”며 “이에 시점을 2015년 12월 31일로 보고 삼성에피스에 대한 지배력 상실 처리를 했다”고 말했다. 또한 재판부는 “이는 회계 처리 기준을 위반해 삼성에피스 투자 주식을 공정 가치로 부당하게 평가함으로써 관련 자산 및 자기자본을 과대 계상한 것에 해당한다고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행정법원이 이같은 판단을 내린 것을 두고 이 회장의 부당합병·회계부정 1심 판결 내용이 주목 받고 있다. 해당 소송을 심리한 형사소송 재판부의 판결 내용이 행정소송 재판부의 판단과 크게 상이한 때문이다.
당시 1심 재판부는 삼바와 관련한 거짓 공시, 분식회계를 한 혐의에 대해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삼성에피스의 성공 여부가 불확실했던 상황 등을 고려하면 바이오젠이 보유한 콜옵션에 대한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분식회계 혐의도 회계사들과 올바른 회계 처리를 한 것으로 보여 피고인들에게 분식회계의 의도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국민연금의 예기치 않은 손배소, 행정법원의 회계 처리 기준 위반 판단 등으로 이 회장은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하게 됐다. 1심에서 승소하며 사실상 일단락됐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논란이 수면 위로 다시 부상한 것이다.
다만 2심은 1심보다 속도감 있게 진행될 전망이다. 항소심 재판부가 내년 1월 말까지 선고하겠다는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앞서 올 7월 열린 공판준비기일에서 2심 재판부는 “오는 11월 25일 항소심 변론을 종결하면 선고일까지 두달 정도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며 내년 초 선고를 내리겠다고 예고했다.
그러나 만약 검찰이 항소심 결과에도 불복해 상고할 경우 최종 판단까지 2~3년이 더 소요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한편 이날 공판에서는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 삼성바이오에피스 압수 수색에서 확보한 자료 등이 위법하게 수집됐다는 1심 판단과 관련한 증거 조사가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이달 14일에는 회계부정과 관련해, 같은달 28일과 다음달 11일에는 자본시장법 위반과 관련해 심리할 예정이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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