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항소심 2차 공판에도 직접 출석
행정법원 회계 처리 기준 위반 판결 ‘변수’
‘뉴 삼성 재건’ 이재용 경영 행보 초비상
“그룹 지휘할 ‘제2의 미전실’ 부활시켜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부당합병·회계부정’ 항소심 공판이 시작되면서 이 회장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가 재점화했다. 반도체 패권 회복, 미래 먹거리 발굴 등 ‘뉴 삼성’ 재건이 시급한 상황에서 당면한 현안들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삼성의 경쟁력 회복을 주도할 핵심 기구가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과거 미래전략실(미전실)과 같은 컨트롤타워 가동을 통해 위기관리는 물론 그룹의 미래 전략을 일사불란 하게 진두지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고법 형사13부(백강진, 김선희, 이인수 부장판사)는 14일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 등에 대한 항소심 2차 공판을 열었다.
이 회장은 지난달 30일에 이어 이날 열린 두 번째 공판에도 직접 출석했다. 서울고법에 모습을 드러낸 이 회장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곧장 법정으로 향했다.
이날 재판에서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의 분식회계 등 회계 부정 의혹들이 다뤄졌다.
검찰과 삼성측은 각각 두 시간씩 입장을 발표하며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다만 재판부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미지수다. 2심 공판이 열리기에 앞서 변수가 생겼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지난 첫 번째 공판에서 검찰의 공소장 변경 신청을 받아들였다. 공소장 변경 신청의 주 내용은 올해 8월 서울행정법원이 내린 판결을 공소 사실에 반영하는 것이다.
앞서 지난 8월 행정법원 행정3부(최수진 부장판사)는 삼바가 증권선물위원회(증선위)를 상대로 낸 시정요구 등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하면서도, 삼바의 2015년 삼성바이오에피스(삼성에피스) 지배력 상실 처리와 관련해 ‘회계 처리 기준 위반’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행정법원은 “삼바는 자본 잠식 등의 문제를 회피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별다른 합리적 이유가 없는 상태에서 ‘단독 지배에서 공동 지배로 변경됐다’고 주장했다”며 “이에 시점을 2015년 12월 31일로 보고 삼성에피스에 대한 지배력 상실 처리를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회계 처리 기준을 위반해 삼성에피스 투자 주식을 공정 가치로 부당하게 평가함으로써 관련 자산 및 자기자본을 과대 계상한 것에 해당한다고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행정법원이 이같은 판단을 내리면서, 이 회장의 부당합병·회계부정 1심 판결 내용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해당 소송을 심리한 형사소송 재판부의 판결 내용이 행정소송 재판부의 판단과 크게 상이하기 때문이다.
당시 1심 재판부는 삼바와 관련한 거짓 공시, 분식회계를 한 혐의에 대해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삼성에피스의 성공 여부가 불확실했던 상황 등을 고려하면 바이오젠이 보유한 콜옵션에 대한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분식회계 혐의도 회계사들과 올바른 회계 처리를 한 것으로 보여 피고인들에게 분식회계의 의도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행정법원의 회계 처리 기준 위반 판단을 2심 재판부가 함께 살펴보기로 하면서 이 회장은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하게 됐다. 1심에서 승소하며 사실상 일단락됐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논란이 수면 위로 다시 부상한 것이다.
사법 리스크가 다시 재점화 되면서, 이 회장의 뉴 삼성 비전에도 제동이 걸리게 됐다.
실제로 이 회장은 4년째 법정 다툼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 2020년 10월 부당합병·회계부정 재판이 처음 시작된 후부터 올해 2월 최종 선고까지 약 3년 5개월 동안 무려 107차례의 심리가 열렸다. 이 중 이 회장은 총 96차례 직접 출석했다.
이 기간 동안 이 회장은 그룹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사실상 모든 재판에 출석하는 바람에 반도체 경쟁력 제고,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한 지속 투자 등 굵직한 현안과 관련한 의사결정을 내리기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재도약 시키겠다는 이 회장의 뉴 삼성 비전 실현도 상당 기간 동안 차질이 불가피했다. 그 사이 ‘메모리 최강자’였던 삼성전자는 HBM(고대역폭메모리) 패권을 경쟁사에 내줬고, 스마트폰 등 일부 주력 사업도 중국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과거 ‘M&A(인수합병)를 통한 신성장 동력 발굴’ 계획도 점차 잦아드는 추세다.
지난 2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으며 사법 리스크를 털어내는 듯했던 이 회장은 검찰의 항소로 길고 길었던 법정 다툼을 다시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이 내년 초 항소심 선고가 내려지기까지 사법 리스크에 매달리면서, 삼성그룹의 수장으로서 경영 행보를 이어가는데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이 회장을 대신해 삼성그룹의 의사결정을 총괄할 컨트롤타워를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삼성은 2017년 그룹의 컨트롤타워였던 미전실을 폐지하고, 사업 부문별로 3개의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각 사업을 통합 관리하는 조직의 부재로 업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줄곧 제기돼 왔다.
삼성 내부에서 발현된 위기는 결국 실적 부진으로 이어졌다. 당장 올 3분기 삼성전자는 시장의 기대에 못 미치는 9조원대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특히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을 영위하는 DS(디바이스솔루션) 부문 영업익은 5조원대에 머물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제기됐다.
삼성 반도체 수장인 전영현 삼성전자 DS 부문장 부회장이 이례적으로 사과 메시지를 내는 초유의 사태도 발발했다.
일각에서는 현재와 같은 TF 체제가 삼성의 실적 부진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성의 모든 부서가 제각기 따로 분리돼 유기적인 협업이 어려워지다 보니 과거처럼 일사분란함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삼성의 주력 사업이 차질을 빚는 계기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재계 안팎에서는 삼성도 통일성 있게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컨트롤타워을 재건해야 한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국내 굴지의 여타 그룹들은 대부분 컨트롤타워를 통해 그룹을 진두지휘 하고 있다.
LG의 경우 지주사인 LG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고 있다. 이를 통해 그룹의 의사결정 사안을 계열사에 안정적으로 전달한다. SK도 SK수펙스추구협의회(SK수펙스)를 통해 계열사들이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최근 이 회장 앞에는 반도체 주도권 탈환, 미래 먹거리 발굴 시급 등 여러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그러나 현재의 TF 체제로는 뉴 삼성 비전을 구체화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과거 미전실에 준하는 그룹 내 컨트롤타워를 부활시켜 이 회장이 그룹을 효율적으로 총괄할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에 준법 경영 문화를 뿌리내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법위)도 컨트롤타워 재설치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이찬희 삼성 준법위원장은 “작은 돛단배에는 컨트롤타워가 필요하지만 삼성은 어마어마하게 큰 항공 모함이다”며 “개인적 신념으로는 그룹 컨트롤타워 복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재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도 “삼성은 현재 반도체·바이오 등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며 “이 회장이 그룹 계열사 전반을 통합 관리할 수 있는 ‘제2의 미전실’ 부활의 필요성이 더욱 더 절실해 지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이 회장의 부당합병·회계부정 항소심 공판은 다음달까지 계속된다. 2심 재판부는 이달 28일과 다음달 11일 자본시장법 위반과 관련해 심리할 예정이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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